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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RPG 스토리텔링 <사건의 재구성 : 사건번호X>

1_#3 목격자의 증언_이진성

목격자3. 벨보이 이진성 : 피해자의 내연녀가 황급히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

by 조경선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호텔 앞에 서 있었다. 방금 들어온 메르세데스 벤츠에서 노신사가 내렸다. 나는 운전기사에게서 두툼한 가방을 건네받았다. 버버리 가방이었다. 노신사가 멋들어지게 걸친 외투 브랜드도 버버리였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가고 스위트룸까지 안내하는 동안 나는 줄곧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예의바르면서 미소를 띠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것이 노신사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노신사는 내가 예의바르며 듬직한 청년이라고 칭찬을 했다.

호텔을 찾는 손님들에게 싹싹하게 굴 것과 항상 겸손하게 행동할 것!’

내 전임자가 철저히 가르친 것들이다. 처음에는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차츰 그런 태도가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행동해서 착실하다는 평판을 얻으면, 억울하거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이것이 요령 좋게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이겠지,하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타인의 깊은 속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다.

노신사의 객실을 나온 뒤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모자를 반듯하게 썼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공손하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미소를 얼굴에 장착했다.

내가 곧 호텔의 얼굴이라고 생각해.’

전임자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 말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벨 보이가 아니라 호텔만큼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홀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나지막하면서도 굵은 음성이 내 귀를 잡아끌었다. 그 음성을 따라 시선을 움직여 다소 낡은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예의바르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나는 손님이 아니라…….”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자신의 지갑을 꺼내서 그 안을 보여주었다.

서부 경찰서, 김상도 형사.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났으니 형사가 주변을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나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어제 호텔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그렇군요.”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형사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들 중 어제 호텔에서 본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어제는 상당히 바쁜 날이었어요. 국회의원의 출판강연회 때문에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았거든요. 정신없이 일해서 기억이 날지……. , 이 사람!”

나는 꽤나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 사진을 가리키며 고개를 들고 형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손가락에 습진이 생겼네요.”

형사가 말했다.

그는 사진을 가리킨 왼손 검지와 중지를 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두 손가락에 난 물집을. 그래서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이 물집들은 언제 생긴 거지?”

나도 모르던 일이었다. 손님들의 짐을 옮기다보면 어딘가에 부딪쳐 상처가 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조그만 상처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하니까.

이 여성이 확실합니까?”

형사의 목소리가 눈앞의 일로 주의를 돌렸다.

. 이 여성이 급히 뛰어나오다 저와 부딪힐 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디였는지 기억납니까?”
VIP룸이 있는 층이었습니다. 다른 객실 손님을 안내하다 봤습니다.”

내 말에 형사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렸다.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객실을 사용하고 계신 손님은 한 눈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위압적인 것이 어디에선가 주먹으로 이름을 날릴 것 같은 사람이었죠. 그런 사람과 되도록 엮이지 않으려고 특히 VIP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거든요. 그런 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여자가 뛰어나와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때가 몇 시쯤인지 기억나십니까?”

그 여자가 방을 뛰쳐나온 시간은 대략 오후 730분 전후였어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 준비로 분주했던 때라 기억이 납니다.”

호오.”

형사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당신은 이 호텔에 벨 보이로 일하고 있는데 레스토랑 상황에 대해서 잘 아는군요?”

형사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훈련 받은 대로 침착한 자세로 돌아갔다.

친구가. 레스토랑에 근무하는 이주영이 제 친구거든요. 그래서 그쪽 상황은 잘 알고 있죠.”

대답을 하면서 나는 형사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적으로 보인 빈틈에 형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형사는 여전히 사무적인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혹시, 그 여성 외에 VIP룸 주위를 맴도는 사람은 없었나요?”

글쎄요. 딱히 기억나는 사람은 없네요.”

형사는 그다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형사도 나처럼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형사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협조 감사합니다.”

나는 형사의 뒷모습을 힐긋 쳐다본 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의 바르고 격식 있는 태도!’

전임자의 말처럼 예의 바르고 격식 있는 태도는 내게 도움이 되었다. 지금같은 순간에는 더 그랬다.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이면서 내 감정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포커 판에서 꾼들은 이런 태도를 잘 취해야 한다. 특히, 그들의 손에 결정적인 카드가 있을 때, 반드시라고 할 만큼 이런 방어막을 쳐야 한다. 그것이 게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