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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RPG 스토리텔링 <사건의 재구성 : 사건번호X>

2_#4 피해자와의 관계_박아영

용의자 3. 내연녀 박아영 : 살해된 보스의 내연녀. 피해자와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by 조경선

 

나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15개가 넘는 쇼핑백들을 의자 가까이에 놓았다.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 안을 꼼꼼하게 돌아다닌 터라 다리에 쥐가 났다. 쇼핑백들을 내내 들고 있었기에 팔도 아팠다.

나는 평소에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찜찜하면 거의 언제나 쇼핑을 했다. 비싼 물건들을 둘러보고 고르는 동안 마음에 남아 있던 안 좋은 것들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사고 또 사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어쨌든 성범 씨 직업이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거야…….”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초조한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어제 서준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뒤로 마음이 계속 오르락내리락 했다. 서준은 성범이 그랜드 호텔에서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때 받은 충격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머리가 아찔했다.

설마 이 집을 내놔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54평의 고급 아파트인 이 집은 성범이 내게 사준 집이다. 역세권에 위치한데다 새 건물이나 마찬가지여서 팔면 꽤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그 일 때문에 내가 왜 피해를 봐야하는 거야? 성범 씨 일은 성범 씨 일이지 내 일이 아니잖아? 이 집은 내 거야. 폭력단 운영해서 번 돈이든 뭐든 그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그리고 나는 이미 대가를 치렀어. 누구든 가져갈 수 없어. 성범 씨 부인이어도 그럴 권리가 없어. 게다가 그 여자는 이미 많이 가지고 있잖아? 그런 주제에 이 집까지 뺏으러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거의 언제나 승용차 한 대 값 정도를 몸에 걸치고 다니는 여자가 이 집마저 욕심내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된다. 더구나 이번에 성범이 죽었기에 그 많은 재산은 모두 그 여자가 차지할 것이다. 성범의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때였다.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평화로운 정적을 깼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짧게 몸을 떨었다. 평소에 익숙한 그 소리가 순간적으로 소름끼치게 들렸다.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어 올려 귀에다 대었다.

너지?”

상당히 쉰 목소리여서 누군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누구세...”

상대방은 내 말은 가차 없이 잘랐다.

여태껏 그 사람 때문에 호의호식을 해 왔으면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성범의 부인인 김민이었다. 김민은 같잖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는 왈칵 화가 났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예요?”

내가 모를 줄 알아? 서준과 짜고 그랜드 호텔에서 그 사람을 죽였잖아. 평소에 서준에게 슬슬 꼬리치더니 이럴 때 써 먹으려고 그런 거였어?”

난 그 사람을 안 죽였어요. 그리고 내가 언제 서준에게 꼬리를 쳤다는 거예요?”

김민은 내 말 따윈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 호텔에서 널 본 사람이 있어. 그런데 어쩌나. 네가 한 짓이 밝혀지면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알량한 사치도 더 이상 못 누릴 거야. , 다시 예전의 지긋지긋하고 가난한 생활로 돌아가는 거지. 교도소에 갔다 와서 말이지만…….”

난 성범 씨를 죽이지 않았다니까요!”

다음 순간 귀 속으로 -’ 소리만 들어왔다. 미라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 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나는 맥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에서 호텔에서 널 본 사람이 있어라고 했던 김민의 말이 계속 울렸다. 그 때문에 그 여자가 날 성범의 살인범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범이 죽은 날에 내가 그 호텔에 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성범을 죽이러 간 것은 아니다. 단지 김민과 서준 그리고 파라다이스 파 조직 두목에 대해 알려주려 간 것이다. 그 세 사람은 성범을 싫어하고 해를 입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성범을 만나지도 못했다. 분명 성범이 머무르는 방까지 갔었다. 하지만 성범은 방에 없었다. 호화로운 침대에 이불이 젖혀져 있는 것을 보고 성범이 방에 들어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잠시 밖에 나간 것 같았다. 침대 옆에 동그랗고 작은 탁자가 있었다. 그 탁자 위에 와인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찌릿한 충격을 받았다. 그 와인은 성범의 부인이 자주 마시는 와인이었다. 그리고 서준이 그랜드 호텔로 갈 때 가져가라며 내게 준 와인과 똑같았다. 나는 뒤로 돌아 급히 그 방을 뛰쳐나왔다. 머릿속에는 성범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범을 찾아 김민의 계획을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성범을 찾지 못했다.

김민, 그 여자가 성범 씨를 죽였을 거야.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데다 성범 씨를 너무 싫어했으니까. 분명 그럴 거야. 내가 성범 씨 덕분에 잘 사는 게 싫었던 거야.”

나는 그랜드 호텔에서 성범을 찾지 못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더 후회했다.

이제는 정말 어떡하지…….”

힘이 없어 소파에 축 늘어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집 안에 생생히 울렸다.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움찔거리며 놀랬다. 이번에는 전화벨 소리가 아니었다. 초인종 소리였다.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잠시 소파에 앉아 있다 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방문자가 내가 일러바친 그 세 사람 중 한 명이 아니길 바라며 현관으로 향했다